
갑신정변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급진개화당파가 개화정권을 세우려다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실패한 쿠데타예요.
- 일어난 날
-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 주도 세력
-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급진개화당파
- 결과
-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실패, 3일 만에 끝나 '3일 천하'라고도 불려요
- 분류
- 정변

갑신정변은 어떻게 일어났나요?
12월 4일 저녁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고종과 민비를 경우궁으로 옮기고, 민씨 척족을 쫓아내거나 일부 처형했어요. 12월 6일 오후에는 중국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 개혁 등의 정책을 내놨어요. 지금 전하는 개혁 정강 기록은 14개 조항이지만, 80개 조항이었다는 견해도 있어요.
어떤 배경이 있었나요?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이 이뤄졌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가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실각시켰어요. 이 시기 개화파가 생겨나 세력을 넓혔고 무력 정변을 준비했어요.
청나라의 간섭이 커졌어요. 1876년 개항 뒤 조선은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 질서에서 벗어나 새 국제 질서에 적응해야 했어요. 1882년 임오군란 뒤에는 청이 군사력을 앞세워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관여했고,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은 뒤에는 경제적 특권도 얻었어요. 정부 안에서는 청과 가까운 민씨 척족이 개화 사업을 맡았고, 서구식 근대화를 바랐던 개화당은 이 청국식 개화정책에 불만이 많았어요.
개화당은 소수였어요. 개화당은 5~6명에 불과했고 개화정책을 제도로 추진할 권력기구를 쥐지 못했어요. 주도 세력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등이에요. 박영효를 뺀 대부분이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들어갔고, 일본이나 미국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어요. 김옥균은 정변 전에 쓴 「조선개혁의견서」에서 청의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주국을 세우는 것이 첫째 과제라고 적었어요.
국제 정세가 계기가 됐어요. 1884년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청은 조선에 주둔시키던 군대의 일부를 철수했어요. 개화당은 이를 계기로 정변을 결정했다고 우리역사넷은 설명해요. 위키백과는 1884년 7월부터 계획을 세워 9월 17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이 방안을 자세히 밝혔다고 적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병력과 차관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설명해요. 개화당은 우정국 총판으로 임명된 홍영식이 여는 개설 기념 연회를 거사일로 잡았어요.
왜 실패했나요?
민씨 정권은 이미 청나라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해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실패했어요. 김옥균이 일본에 의존했다는 비판도 있어요. 그해 12월 말 조선 조정이 일본 측의 개입을 문제 삼았다가 오히려 한성조약을 맺게 됐어요.
우리역사넷의 해설은 실패 원인을 여러 가지로 짚어요. 일본군을 끌어들여 '외국의 군사를 불러들여 군부를 위협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민중도 정변을 일본인과 난당이 일으킨 일로 봤어요. 개화당은 소수여서 정권을 잡은 뒤 유지할 기반이 약했고, 믿고 의지하려던 고종은 정변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자 등을 돌렸어요. 정령도 정치권력 장악과 부국강병에 무게가 실려 당시 사회의 요구를 담는 데 소홀했다고 이 해설은 평가해요. 정변 전부터 윤웅렬은 임금을 위협한 점, 외세에 의존한 점, 인심이 불복한 점, 청군 개입 가능성, 정치세력의 열세를 실패 원인으로 내다봤다고 해요.
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 교과서는 개화사상이 국민 속에 퍼지지 못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개혁을 일본의 힘을 빌려 정변 방식으로 추진해 반발을 샀으며, 일본군보다 수가 많은 청군이 개입한 점을 실패 이유로 들어요. 위키백과는 서재필이 뒷날 회고에서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점과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한 점 두 가지를 꼽았다고 소개해요.
어떤 이름으로 불리나요?
호칭을 모으면 아래와 같아요.
| 시기·주체 | 부른 이름 |
|---|---|
| 진압 직후 | 갑신난, 갑신전란, 갑신반란, 갑신당의 난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갑신혁명당의 난 |
| 박은식 | 갑신혁명 |
| 1970년대 이후 | 중립적 시각에서 갑신정변 |
| 그 밖 | 갑신의거, 갑신사태, 갑신봉기, 3일 천하, 3일 혁명 |
이름이 이렇게 갈린 데는 시대마다 사건을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진압 직후에는 난이나 반란으로 불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박은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제1장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에서 처음 혁명이라고 규정했어요. 해방 뒤에는 '갑신혁명'이라 부르기도 했고, 1970년대 이후 학계는 '갑신정변'이 중립적이라 보고 이 이름을 써요. 이 글은 우리역사넷과 위키백과가 모두 쓰는 '갑신정변'으로 통일해요.
정변은 며칠 동안 어떻게 전개됐나요?
정변은 1884년 12월 4일 밤에 시작해 12월 6일 저녁에 끝났어요. 우리역사넷은 걸린 시간을 46시간 정도, 만 이틀이 채 되지 않는다고 적어요. 아래 표의 음력은 『갑신일록』이 쓰는 날짜예요. 양력 12월 4일이 음력 10월 17일이에요.
| 날짜(양력/음력) | 일어난 일 |
|---|---|
| 12월 4일/10월 17일 저녁 7시경 | 우정국 신청사에서 축하연이 열렸어요. 홍영식과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민영익·한규직·이조연 등 조선 인사와 미국 공사, 영국 총영사, 청국 영사, 일본 공사관 서기관,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 18명이 참석했어요. |
| 같은 날 밤 9~10시경 | 밖에서 불이 났다는 소리가 나고, 나갔던 민영익이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돌아와 연회장이 어수선해졌어요. |
| 같은 날 밤 | 김옥균 등이 창덕궁의 고종에게 변란을 알리고 경우궁으로 옮기게 했어요. 고종은 일본 병력이 호위하도록 하는 친필 칙서를 내렸고, 일본 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경우궁을 경호했어요. |
| 12월 5일/10월 18일 자정 이후 | 한규직과 이조연이 경우궁 후문에서, 이어 민영목·조영하·민태호가 경우궁에 들어오다 목숨을 잃었어요. 날이 밝자 새 인사를 발표했어요. |
| 12월 5일/10월 18일 오전~오후 | 왕비의 거듭된 요구로 고종은 오전 10시경 계동의 이재원 집으로, 오후 5시경 창덕궁 관물헌으로 옮겼어요. |
| 12월 6일/10월 19일 오전 10시경 | 개화당이 14개 조항의 정령을 반포했어요. |
| 12월 6일/10월 19일 오후 | 청군이 창덕궁을 공격해 교전이 벌어졌어요. 홍영식과 박영교는 고종을 호위해 북묘로 갔다가 목숨을 잃었어요. |
| 12월 6일/10월 19일 저녁 7시 30분경 | 김옥균 등이 일본 공사관으로 후퇴하면서 정변이 끝났어요. |
| 12월 7일/10월 20일 | 일본 공사관에 돌이 날아들고 불이 났고, 오후 2시 30분 일본 공사 일행과 김옥균 등이 인천으로 출발했어요. |
| 12월 8일~10일/10월 21~23일 | 인천 일본 영사관에 도착한 뒤 10월 23일(양력 12월 10일) 일본으로 떠났어요. 망명한 사람은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유혁로·변수 등 9명이에요. |
정변 세력이 움직인 길도 순서가 있어요. 우정국에서 창덕궁으로 가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기고, 다시 계동 이재원의 집, 창덕궁 관물헌으로 옮겼으며, 청군이 공격하자 창덕궁 후원을 거쳐 북묘로 향했어요. 일본 공사관은 경우궁에서 가까운 교동에 있었어요. 우정총국 건물은 지금 사적 213호이고 체신기념관으로 쓰여요.
갑신정변은 어떤 결과와 영향을 남겼나요?
조선 정부의 대응. 정변을 진압한 조선 정부는 1884년 12월 말 예조참판 서상우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일본에 보내 정변에 일본이 관여한 일을 따지고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의 송환을 요구했어요. 일본은 오히려 공사관이 불타고 서기관 등이 숨진 책임을 물었어요.
한성조약(1885년 1월 9일).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군대를 이끌고 인천을 거쳐 한성에 들어왔고, 김홍집과 이노우에 사이에 전문 5개 조의 한성조약이 체결됐어요. 조선이 일본에 사과하고, 사망자와 기물 파손에 대한 배상금 10만 원을 내고, 일본 공사관을 새로 짓는 비용을 부담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요.
톈진조약(1885년 4월 18일). 청나라 군대의 개입이 문제가 되면서 청·일 양국은 조선에서 양국 군대를 철수하고, 앞으로 한쪽이 파병할 때는 상대에게 알리기로 하는 톈진조약을 맺었어요.
개화당의 몰락과 우편 중단. 정변 직후 조선 정부는 정변을 역모로 규정하고 서재창 등을 처형했고, 남은 개화파도 색출됐어요. 정변이 일어난 우정국은 운영 20일 만인 12월 8일 고종의 교지로 폐지됐고, 10년 반 뒤인 1895년 우체사가 설치되면서 우편사업이 재개됐어요. 우리역사넷도 남은 행동대원들이 대역죄로 처단되고 개화정책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고 정리해요.
망명한 사람들. 일본에서 냉대를 받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은 1885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김옥균은 일본에 남았어요. 김옥균은 일본을 거쳐 상하이로 갔다가 1894년 3월 28일 상하이의 호텔에서 홍종우에게 저격당해 숨졌어요.
갑신정변에는 어떤 인물이 관련돼 있나요?
정변에 관련된 인물은 개화당 쪽, 정변으로 목숨을 잃은 조선 정부 인사, 정변에 간여한 외국인으로 나눌 수 있어요. 아래 표는 우리역사넷과 위키백과에 나오는 대표 인물만 골랐어요.
| 구분 | 인물 | 정변과의 관계 |
|---|---|---|
| 개화당 | 김옥균 | 정변을 이끈 중심 인물. 정변 뒤 호조참판에 임명, 일본 망명 후 1894년 상하이에서 피살 |
| 개화당 | 박영효 | 고종의 부마. 정변 뒤 전후영사 겸 한성판윤. 일본·미국으로 망명 |
| 개화당 | 서광범 | 정변 뒤 서리외무독판. 일본·미국으로 망명 |
| 개화당 | 서재필 | 사관생도를 이끌고 거사에 참여, 병조참판 겸 정령관. 일본·미국으로 망명 |
| 개화당 | 홍영식 | 우정국 총판. 청군과의 교전 속에 고종을 호위하다 목숨을 잃음 |
| 개화당 | 박영교 | 박영효의 형. 승정원 도승지, 홍영식과 함께 고종을 호위하다 목숨을 잃음 |
| 정변으로 목숨을 잃은 인사 | 한규직, 이조연, 윤태준,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 정변 첫날 밤부터 이튿날 사이에 목숨을 잃음 |
| 부상 | 민영익 | 우정국 연회장 밖에서 칼에 맞아 크게 다침 |
| 왕실 | 고종, 명성황후 | 경우궁·계동·창덕궁으로 옮겨 다님. 왕비는 거듭 창덕궁 환궁을 요구 |
| 일본 | 다케조에 신이치로 | 일본 공사. 병력과 차관 지원을 약속하고 경우궁을 경호했으나 청군이 오자 철수 |
| 청 | 위안스카이 | 서울에 남은 청군을 이끌고 창덕궁에 진입 |
| 외국인 고문 | 묄렌도르프 | 우정국 연회에 참석한 독일인. 정변 뒤 망명자 추격에 나섬 |
| 암살자 | 홍종우 | 1894년 3월 28일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저격 |
정변을 알려 주는 사료에는 무엇이 있고 서로 어떻게 다른가요?
정변을 직접 기록한 가장 중요한 사료는 김옥균이 쓴 『갑신일록』이에요. 정변의 행동계획과 14개 조항의 정령이 이 책에 전해지고, 우리역사넷의 『신편 한국사』도 이 기록을 추려 행동계획을 정리했어요. 그 밖에 참고 문헌에는 김옥균·박영효가 쓴 『갑신정변 회고록』, 정변 관련자 심문 진술을 모은 『추안급국안』,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같은 자료가 올라 있어요.
자료마다 숫자와 시각이 다르게 적힌 대목이 있어요. 아래는 서로 다르게 전하는 내용을 모은 표예요.
| 항목 | 한 자료 | 다른 자료 |
|---|---|---|
| 정령 조항 수 | 일본인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 | 『갑신일록』에는 14개 조항만 전함 |
| 정변 소요 시간 | '3일 천하'(3일 만에 진압) | 10월 17일 저녁부터 10월 19일 저녁 7시경까지 46시간 정도 |
| 일본 병력 | 일본 공사관 병력 150명 지원 제안(다케조에), 일본군 150여 명 |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200여 명 |
| 청군 병력 | 다케조에의 보고 문서는 청 병력을 5~6백 명으로 추산 | 서울의 청군 1,500여 명 |
| 방화 신호 | 별궁에 불을 질러 신호로 삼기로 계획 | 실제로는 9시경 별궁 옆 초가에 방화 |
| 정령 반포 시각 | 12월 6일 날이 밝자 발표 | 10월 19일 오전 10시경 반포 |
| 일본군 피해 | 일본군 2명 전사, 8명 부상 | 일본군 30여 명 사망 뒤 퇴각 |
| 거사 계획 시점 | 1884년 7월부터 계획 | 1년 6개월 전, 1년 전, 1884년 5월경, 7~8월경 등 여러 견해 |
| 처단된 관료 | 윤태준·한규직·이조연·민영목·민태호·조영하와 환관 유재현 | 윤태준 등 11명 |
우리역사넷은 정변 계획 시점에 여러 견해가 있고, 결정적인 계기는 청불전쟁 소식이 구체적으로 전해진 1884년 6월경으로 추정된다고 적어요. 표의 값이 서로 다른 이유는 각 자료가 다른 기록을 근거로 삼았거나 헤아리는 기준이 달라서일 수 있어요.
시험 준비용으로 외울 핵심은 무엇인가요?
교과서와 국사편찬위원회 해설을 바탕으로 줄이면 다음과 같아요.
- 언제: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개국 축하연) 날 밤이에요.
- 누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등 개화당(급진 개화파)이에요.
- 왜: 임오군란(1882) 뒤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졌고, 1884년 청불전쟁으로 청군 일부가 철수한 틈을 이용했어요.
- 도움: 일본 공사관의 병력과 차관 지원을 약속받았어요.
- 정강 14개조: 청에 대한 조공 허례 폐지(자주), 문벌 폐지와 인민평등권, 지조법 개혁, 혜상공국·규장각·내시부 혁파, 순사 설치, 대신과 참찬이 매일 의정소에서 회의해 정령을 결정(내각 중심)이에요.
- 결과: 청군의 개입으로 약 3일(46시간) 만에 실패했고 주도자 9명이 일본으로 망명했어요.
- 그 뒤: 한성조약(1885년 1월)으로 일본에 사과·배상하고, 톈진조약(1885년 4월)으로 청·일 양군이 철수했어요.
- 실패 이유 세 가지: 민중 지지 부족, 일본에 의존한 개혁 방식, 수가 많은 청군의 개입이에요.
갑신정변 전후의 흐름을 연표로 보면 어떻게 되나요?
아래 연표는 개항부터 우편사업이 다시 열리기까지의 흐름이에요. 날짜는 우리역사넷과 날이에요.
| 연도·날짜 | 사건 |
|---|---|
| 1876년 2월 27일 |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 개항 |
| 1880년 | 제2차 수신사가 『조선책략』을 가져옴, 통리기무아문 설치 |
| 1882년 |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 심화 |
| 1882년 8월 | 임오군란 수습을 위해 박영효·김옥균·서광범 등이 참여한 수신사 일본 파견 |
| 1884년 4월 | 우정총국 설치, 청불전쟁 발발 |
| 1884년 9월 17일(위키백과 표기) |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이 정변 방안을 자세히 밝힘 |
|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로 정한 날 | 음력 10월 13일(양력 11월 30일)에 거사일을 음력 10월 17일로 결정(우리역사넷) |
| 1884년 12월 4일 | 우정국 축하연, 정변 시작,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김 |
| 1884년 12월 5일 | 민영목·조영하·민태호 등 피살, 새 인사 발표, 창덕궁 관물헌으로 이어 |
| 1884년 12월 6일 | 14개조 정령 반포, 청군 공격으로 정변 종료 |
| 1884년 12월 7일~10일 | 일본 공사관 후퇴, 인천을 거쳐 망명길에 오름 |
| 1884년 12월 8일 | 우정국 폐지 |
| 1885년 1월 9일 | 한성조약 체결 |
| 1885년 4월 18일 | 톈진조약 체결 |
| 1894년 3월 28일 |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저격당함 |
| 1895년 | 우체사 설치로 우편사업 재개 |
출처
- 갑신정변 — 위키백과 · 2026년 10월 22일 시행 · 2026년 10월 24일 확인(새 창)
- 갑신정변(Q488282) — 위키데이터(Wikidata) · 2026년 10월 24일 확인(새 창)
- 한국사 연대기 근대 ‘갑신정변’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신편 한국사 38권 Ⅴ. 갑신정변 3. 갑신정변의 전개 2) 갑신정변의 준비 (6) 행동계획의 최종 정리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 Ⅶ. 개화와 자주 운동 —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통해 이루려 하였던 것은?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줌인][충청의 인물과 사건(6)] 갑신정변 혁명가 김옥균(중) — 대전일보 (2026-02-22, 확인 2026-10-25)(새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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