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
영조(英祖, 1694~1776)는 조선의 제21대 국왕으로, 1724년 10월 5일부터 1776년 4월 11일까지 재위했어요.
- 재위 기간
- 51년 7개월,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길어요
- 수명
- 81세 5개월,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장수
- 정책
- 노론과 소론의 당론을 중재하는 탕평책
- 부모
- 숙종과 숙빈 최씨
- 분류
- 조선 국왕

영조는 누구인가요?
영조의 성은 이(李), 휘는 금(昑)이고 숙종의 넷째 아들이에요. 어머니는 숙빈 최씨이고, 경종의 이복 동생으로 숙종 때부터 잠재적 왕위 계승권자였어요. 1699년 연잉군에 책봉됐고, 경종이 즉위하자 왕세제로 책봉됐어요. 신임사화 등 여러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 즉위했어요.
영조의 기본 정보는 어떻게 되나요?
| 항목 | 내용 |
|---|---|
| 이름 | 이금(李昑), 즉위 전 작호는 연잉군 |
| 출생 | 1694년(숙종 20년) 음력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 |
| 부모 | 아버지 숙종, 어머니 숙빈 최씨 |
| 즉위 | 1724년(영조 즉위년) 음력 8월 30일, 창덕궁 인정문 |
| 재위 | 1724년 10월 5일~1776년 4월 11일, 51년 7개월 |
| 사망 | 1776년(영조 52년), 경희궁 집경당 |
| 수명 | 81세 5개월 |
| 묘호 | 처음에는 영종, 고종 때 영조로 바뀜 |
| 왕비 | 정성왕후 서씨(정비), 정순왕후 김씨(계비) |
| 아들 | 효장세자, 사도세자 |
| 능 | 원릉(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사적 제193호 |
| 정책 | 탕평책, 균역법, 속대전 편찬 등 |
| 위키데이터 번호 | Q485009 |
어떤 정치를 했나요?
재위 기간에 완론탕평을 주창하며 노론과 소론의 당론을 중재하는 탕평책을 추진했어요. 악형 폐지와 서적 간행 등도 추진했어요. 다만 위키백과는 탕평론은 실패했다고 평가해요.
연표는 어떻게 되나요?
흐름을 모으면 아래와 같아요.
| 시기 | 내용 |
|---|---|
| 1694년 | 창덕궁에서 출생 |
| 1699년 | 연잉군에 책봉 |
| 1704년 | 서씨(정성왕후)와 혼례 |
| 1724년 | 즉위 |
| 재위 중 | 탕평책, 이인좌의 난, 인권과 경제정책, 학문 진흥 |
| 재위 후반 | 세자의 대리청정과 갈등, 임오화변, 세손의 대리청정 |
| 1776년 | 사망 |
위 흐름 사이에 있었던 굵직한 일을 해마다 나눠 보면 아래와 같아요. 음력으로 적힌 날짜는 '음력'이라고 밝혔어요.
| 연도 | 있었던 일 |
|---|---|
| 1694년 | 음력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에서 숙종과 숙빈 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
| 1699년 | 12월 24일 연잉군에 책봉 |
| 1704년 | 사릉 참봉 서종제의 딸 서씨(정성왕후)와 가례 |
| 1719년 | 정빈 이씨에게서 첫아들 경의군 행(효장세자)을 얻음 |
| 1721년 | 경종 1년 음력 8월, 경종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됨 |
| 1724년 |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음력 8월 30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
| 1727년 | 노론 강경파를 내보내고 노론과 소론을 고루 쓰는 정미환국 |
| 1728년 |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가 진압됨 |
| 1750년 | 균역법 시행 |
| 1752년 | 훗날 정조가 되는 손자 이산 출생 |
| 1759년 | 10월 준천을 맡을 기관인 준천사 설치 |
| 1760년 | 2월 18일부터 57일 동안 청계천 준천 공사 |
| 1762년 |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 임오화변 |
| 1773년 | 6월 개천 양쪽을 돌로 쌓는 두 번째 공사 시작 |
| 1774년 |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함 |
| 1776년 | 경희궁 집경당에서 세상을 떠남 |
즉위하기 전에는 어떤 위기를 넘겼나요?
숙종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후계를 두고 정치 세력이 둘로 갈렸어요.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이 맞섰고,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과 연잉군은 위기를 맞았어요.
1721년 경종은 이복 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했어요. 노론이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건의하자 소론이 노론의 속뜻을 문제 삼았고, 경종은 목호룡의 고변이 터진 뒤 노론을 반역으로 몰아 정국을 바꿨어요. 이 신임사화로 노론의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비롯한 고관 50여 명이 사형당해 연잉군은 든든한 지지 세력을 잃었어요.
1724년 경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영조가 즉위했어요. 경종이 숨지기 전에 게장과 꿀 등을 먹은 일이 있어서 즉위 초부터 경종 독살설이 돌았고, 이 소문은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 때도 다시 언급되면서 재위 내내 정통성 문제로 따라다녔어요. 국립중앙박물관도 즉위 뒤에 경종 독살설을 내세워 왕위 계승에 의혹을 제기하는 무리가 있었다고 밝혀요.
탕평책은 어떻게 펼쳤나요?
영조는 즉위 직후 신임사화를 일으켰던 소론의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형했고, 한동안 노론 정권을 세웠어요. 그러다 노론의 독주를 걱정해 소론 일부를 쓰기 시작했고, 1727년에는 노론 강경파를 내보내며 두 당을 고루 쓰는 탕평책을 기본 정책으로 삼았어요.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은 영조가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이라면 어느 붕당이든 쓰려 했고, 붕당을 만드는 사람은 영원히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정리해요. 노론 강경파를 물리치고 소론과 남인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했으며, 이 뜻을 알리려고 성균관에 붕당 다툼을 금하는 탕평비를 세웠어요. 우리역사넷의 다른 해설은 영조가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었고, 붕당의 뿌리를 없애려고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근거지인 서원을 크게 정리했다고 설명해요. 이조 전랑이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 관리를 뽑던 관행도 없앴어요.
'탕평'은 유교 경전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고 무리를 짓지도 않는 상태를 뜻해요.
탕평책 안에서도 영조는 노론 가운데 어느 파에 서지도 않고 성리학의 원칙을 앞세운 청명당파를 쓰면서 노론 강경파와 외척을 견제하려 했어요. 청명당은 소론과 남인을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해 영조의 탕평책과는 어긋나기도 했어요.
이인좌의 난은 무엇이었나요?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와 이유익 등이 소현세자의 증손자 밀풍군 탄을 임금으로 세우겠다며 무력으로 일어난 사건이에요. 소론 강경파인 준소파와 1701년 이후 밀려난 남인 강경파가 가담했고, 충청도 청주성이 거점이었어요.
반란군은 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곡을 하며 경종 독살설을 퍼뜨렸어요. 경상도와 전라도로 번졌고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전사하기도 했지만 관군이 진압했어요. 난이 끝난 뒤 영조는 경상도를 반역향으로 규정해 과거를 막고 금고령을 내렸고, 대구감영에는 평영남비를 세웠어요. 안동, 예천, 대구의 유생들은 스스로 창의군을 만들어 진압에 나섰다고 하지만 영조는 남인이 많이 가담했다는 이유로 호소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영남 남인은 정조 때 영남만인소를 두 차례 올려 억울함을 호소했어요.
영조의 업적은 누가 이끌었나요?
영조의 업적으로 꼽히는 정책 가운데 기록으로 주도자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아요. 우리역사넷과 청계천 누리집 모두 국왕이 직접 정책을 정하고 현장에서 챙겼다고 설명하지만, 정책마다 실제로 일을 해낸 사람들의 몫은 다르게 나타나요.
| 정책 | 국왕의 역할 | 구체적인 내용과 함께한 주체 |
|---|---|---|
| 탕평책 | 붕당을 만드는 자를 정치에서 배제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탕평비를 세움 | 영조의 뜻에 동의한 탕평파가 정국 운영의 중심이고 영조가 정국을 주도 |
| 균역법(1750년) | 군역 부담을 덜어 주려고 시행 | 포목 2필을 1필로 줄여 세금 부담을 덜어 준 제도 |
| 형벌 완화·신문고 | 지나친 형벌과 악형을 금지하고 신문고를 부활 |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 |
| 법전·서적 편찬 |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해 문물 제도를 정비 | 영조가 서문을 직접 쓴 책도 여러 권 |
| 청계천 준천(1760년) | 여러 차례 현장에 나가 일을 독려하고 일꾼을 위로 | 한성부민 15만 명과 고용 인력 5만 명 등 모두 20만 명이 동원됨 |
균역법 시행은 우리역사넷이 1750년으로 적어요. 위키백과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여 세금 부담을 크게 덜었다고 설명해요. 속대전은 법전 체계를 정리한 책이에요.
청계천 준천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서울시설공단의 청계천 소개에 따르면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 뒤 도성으로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서울 인구가 1657년 8만 명 남짓에서 1669년 19만 명으로 늘었어요. 생활하수가 늘고 개천 변에 채소밭이 생겨 물길이 막혔으며, 벌목으로 민둥산이 된 산에서 토사가 쓸려 내려와 영조 즉위 무렵에는 개천 바닥이 평지와 같은 높이가 됐어요.
영조는 시행 여부를 조정 관리와 백성에게 여러 번 묻고 1759년 10월 준천사를 설치했어요. 1760년 2월 18일 시작한 공사는 송기교에서 영도교까지 8개 구간으로 나눠 4월 15일까지 57일 동안 이어졌고, 전(錢) 35,000민과 쌀 2,300여 석이 들었어요. 이 과정을 기록한 『준천사실』은 이후 개천을 칠 때의 지침이 됐어요.
1773년 6월에는 1760년에 인력과 물자가 모자라 못 한 양쪽 석축을 쌓는 공사를 했어요. 훈련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이 구간을 셋으로 나눠 맡았고 공사는 2개월 뒤인 8월 초에 끝났어요. 청계천 누리집은 5만여 명의 고용 인력을 쓴 이 공사가 두 차례 전란 뒤 도성으로 몰려온 유민을 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설명해요.
학문 진흥과 서적 간행
영조는 스스로 책을 쓰고 인쇄술을 개량해 서적을 많이 펴냈어요. 『속대전』, 『속오례의』, 『무원록』, 『여지도서』, 『동국문헌비고』 같은 책이 이때 편찬됐고, 『어제경세문답』 등은 영조가 직접 지은 글이에요. 1747년에는 중국 한자음과 조선 한자음을 함께 적은 운서 『화동정음통석운고』를, 1751년에는 『삼운성휘』를 펴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는 영조가 국정 운영 방침을 널리 알리려고 서적을 간행한 것을 이전에 없던 소통 방식이라고 소개하고, 한글로 풀어 쓴 언해본을 만들어 일반 백성에게까지 뜻이 전해지도록 했다고 설명해요.
사도세자와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영조가 둘째 아들 사도세자와 갈등을 빚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어요. 문서는 이를 임오화변이라는 장으로 따로 다뤄요.
갈등은 어떻게 깊어졌나요
영조가 건강 문제로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자, 세자는 노론의 의견만 듣지 않고 소론도 일부 등용했어요. 이인좌의 난과 관련해 소론 온건파 이광좌 등의 처벌을 요구하는 노론의 뜻에도 따르지 않았어요. 노론은 세자의 정치관이 잘못됐다고 영조에게 알렸고, 외척 세력도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어요.
임오화변은 어떻게 전개됐나요
1762년(영조 38년) 음력 5월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10여 조목으로 적어 고변했고, 나경언은 처형됐지만 영조는 세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어요. 같은 해 음력 5월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세자를 처분해 세손을 보호하라고 고변했어요.
1762년 7월 4일(음력 윤5월 13일) 영조는 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휘령전 앞의 쌀 담는 뒤주에 가뒀어요. 세자는 며칠 만에 숨졌고, 8일 뒤인 7월 12일 부음이 확인되자 영조는 세자의 위호를 되돌리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어요.
세손은 어떻게 대비했나요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을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했고, 후사 없이 죽은 맏며느리 효순현빈을 승통세자빈으로 봉해 받들게 했어요. 정조에게 즉위하면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라는 유언도 남겼어요. 1774년(영조 50년)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는데, 홍인한 등 노론 지도부가 승지와 사관을 가로막으며 방해했지만 영조는 뜻을 꺾지 않았고 곧 병권과 부절 승인 권한도 세손에게 넘겼어요.
영조의 가족은 어떻게 되나요?
가족 관계 표를 줄여 정리했어요.
| 구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아버지 | 숙종 | 1661년~1720년 | 제19대 국왕 |
| 어머니 | 숙빈 최씨 | 1670년~1718년 | 영조와 여러 왕자의 어머니 |
| 법모 | 인현왕후 민씨 | 1667년~1701년 | 1689년 폐위, 1694년 복위 |
| 법모 | 인원왕후 김씨 | 1687년~1757년 | 혜순대왕대비 |
출처1
왕비와 후궁
| 구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정비 | 정성왕후 서씨 | 1693년~1757년 |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 |
| 계비 | 정순왕후 김씨 | 1745년~1805년 |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 |
| 빈 | 정빈 이씨 | 1694년~1721년 | 효장세자의 생모 |
| 빈 | 영빈 이씨 | 1696년~1764년 | 사도세자의 생모, 정조의 할머니 |
| 귀인 | 귀인 조씨 | 1707년~1780년 | 풍양 조씨 |
| 숙의 | 숙의 문씨 | 미상~1776년 | 정조 즉위년(1776년) 폐서인 뒤 사사됨 |
| 상궁 | 상궁 이씨 | 생몰년 미상 | 후궁 표에 올라 있음 |
출처1
자녀
영조의 아들은 둘이고 모두 세자가 됐다가 대한제국 때 황제로 추존됐어요. 딸(옹주)은 모두 열두 명이에요.
| 구분 | 이름 | 생몰년 | 생모 |
|---|---|---|---|
| 장남 | 효장세자(행) | 1719년~1728년 | 정빈 이씨 |
| 차남 | 사도세자(선) | 1735년~1762년 | 영빈 이씨 |
| 첫째 딸 | 화억옹주 | 1717년~1718년 | 정빈 이씨 |
| 둘째 딸 | 화순옹주 | 1720년~1758년 | 정빈 이씨 |
| 셋째 딸 | 화평옹주 | 1727년~1748년 | 영빈 이씨 |
| 일곱째 딸 | 화협옹주 | 1733년~1752년 | 영빈 이씨 |
| 아홉째 딸 | 화완옹주 | 1738년~1808년 | 영빈 이씨 |
| 열째 딸 | 화유옹주 | 1740년~1777년 | 귀인 조씨 |
| 열한째 딸 | 화령옹주 | 1753년~1821년 | 숙의 문씨 |
| 열두째 딸 | 화길옹주 | 1754년~1772년 | 숙의 문씨 |
출처1
이름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난 옹주 넷(넷째·다섯째·여섯째·여덟째)은 표에서 뺐어요. 효장세자가 일찍 죽은 뒤 후계는 사도세자를 거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로 이어졌어요.
영조는 어떻게 세상을 떠났나요?
영조는 만년에 원로 대신들의 모임인 기로소에 들어갔어요. 1776년(영조 52년)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뒤 경희궁 집경당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국립중앙박물관은 영조가 기로소 입사를 기념한 그림에서 자신과 사도세자의 자리를 나란히 배치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강조했다고 설명해요.
조선 후기에는 임금의 국상에도 3년상을 입는 사대부가 줄었는데, 영조의 국상에서는 빈소를 마련하고 3년상을 마친 선비 주도복과 이상호 등에게 상을 내려 포상했어요.
무덤인 원릉은 1776년 7월 27일에 조성됐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으며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함께 묻혀 있어요. 영조는 1757년 정성왕후가 죽자 아버지 숙종의 명릉 근처에 왕후의 능을 만들고 옆자리를 비워 뒀지만, 정조는 당시 왕대비였던 정순왕후를 의식해 지금의 자리에 원릉을 만들었어요. 원래 이 자리는 증조부 효종이 묻혔다가 옮겨 간 곳이라 논란도 있었어요.
영조는 어떻게 평가받나요?
영조에 대한 평가는 출처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요. 아래는 각 기관과 문서가 한 말을 나눠 적은 거예요.
| 출처 | 평가 |
|---|---|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고,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다툼을 일시적으로 누른 것이라고 평가 |
| 우리역사넷(국사 교과서 해설) | 탕평책으로 소론과 남인이 정치에 나오면서 노론의 독주가 어느 정도 견제됐고,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이 가능해졌으며 왕권도 강화됐다고 설명 |
| 국립중앙박물관 | 영조가 왕위 계승 시비를 풀려고 국왕이 중심이 된 황극탕평을 추진하며 균역법과 준천 같은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마련했다고 소개 |
| 위키백과 | 영조를 조선 사회를 개혁한 계몽군주로 소개하는 서술이 있고, 탕평론 자체는 실패했다는 평가도 함께 실림 |
| 청계천 누리집 | 영조는 준천을 탕평·균역과 함께 80평생 가장 큰 치적으로 내세울 정도였다고 설명 |
사료와 해석이 갈리는 대목
세손 책봉의 의미를 두고는 해석이 나뉘어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일을 후회해 세손을 세웠다는 견해가 있지만, 위키백과는 세손 책봉이 세자가 살아 있던 때 이뤄졌다는 점을 들어 이 견해가 맞지 않다고 서술해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때도 승하 석 달 전이라 정치 교육 목적이었다는 주장과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반론이 함께 있어요. 어느 쪽이든 세손을 둘러싼 영조의 의도는 기록에서 직접 확인되는 사실이 아니라 연구자의 해석이에요.
경종 독살설은 즉위 초부터 유포됐다는 사실과 이인좌의 난 때 거론됐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 독살 여부 자체를 확정하는 사료는 위키백과나 국립중앙박물관 자료에 나오지 않아요.
묘호와 시호는 어떻게 바뀌었나요?
처음 묘호는 영종(英宗)이었고, 고종 때 영조(英祖)로 바뀌면서 존호가 더해졌어요. 묘호 '영조'가 재주와 공덕이 많다는 뜻이에요. 정식 시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으로 매우 길어요.
영조의 흔적은 어디에 남아 있나요?
| 이름 | 지정·소장 | 설명 |
|---|---|---|
| 원릉 | 사적 제193호,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가 묻힌 능 |
| 영조어진 | 보물 제932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영조의 초상화 |
| 영조 기로연·수작연도 병풍 | 보물 제1531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기로소 관련 행사를 그린 병풍 |
| 영조어필-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 | 보물 제1631-1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 영조가 직접 쓴 글씨 |
| 영조어필-숙빈최씨소령묘갈문원고 | 보물 제1631-2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 영조가 직접 쓴 글씨 |
| 영조어필-읍궁진장첩 | 보물 제1631-3호, 수원역사박물관 소장 | 영조가 직접 쓴 글씨 |
| 영조대왕의 도포 | 중요민속문화재 제220호, 대구 파계사 소장 | 영조가 입었다고 전하는 도포 |
| 청주 영조 태실 | 충청북도 기념물 제69호, 청주시 상당구 | 영조의 태를 묻은 곳 |
| 탕평비 | 서울 성균관대학교 구내 | 붕당 다툼을 금하는 뜻으로 성균관에 세운 비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어진은 1900년(광무 4년)에 경운궁 선원전 화재로 잃은 일곱 분 임금의 어진을 다시 그릴 때 채용신과 조석진이 맡아 제작한 것으로, 1744년(영조 20년)의 어진을 본떠 그렸어요. 익선관을 쓰고 홍룡포를 입은 반신상이고, 고종 황제가 직접 쓴 표제가 있어요.
교과서는 영조를 어떻게 정리하나요?
한국사 시험에서는 영조의 탕평책을 정조의 탕평책과 구별하는 문제가 나와요. 우리역사넷 교과서 해설에서 뽑은 핵심은 아래와 같아요.
| 주제 | 핵심 |
|---|---|
| 영조의 탕평 |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 중심, 온건한 인물을 고루 등용 |
| 탕평비 | 성균관에 세워 붕당 간의 다툼을 금함 |
| 산림·서원 |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서원을 대폭 정리 |
| 이조 전랑 | 후임자 천거와 3사 관리 선발 관행을 없앰, 완전한 폐지는 정조 대 |
| 균역법 | 1750년 시행, 군역 부담 경감 |
| 형정 개혁 | 가혹한 형벌 폐지, 사형수 삼심제를 엄격히 시행, 신문고 부활 |
| 편찬 |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
| 정조와 차이 | 정조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적극적 탕평으로 영조 때 커진 척신과 환관을 제거하고 소론과 남인도 중용 |
영조는 어떤 작품에 나오나요?
위키백과에는 영조가 등장하는 소설, 뮤지컬, 방송 작품 목록이 따로 있어요.
| 구분 | 작품 |
|---|---|
| 소설 | 강신재 『대왕의 길』(1998), 류은경 『이산 정조대왕』(2007), 여설하 『이산과 음모』(2007), 김상렬 『목숨』(2008), 마르크 함싱크 『충신』(2009), 김경민 『사도세자』(2012) |
| 뮤지컬 | 『정조대왕』(2007) |
| 방송 | EBS 이야기 한국사 13, 14강 '뚝심의 탕평 영조 이금' |
출처1
출처
- 영조 — 위키백과 · 2026년 10월 14일 시행 · 2026년 10월 24일 확인(새 창)
- 영조(Q485009) — 위키데이터(Wikidata) · 2026년 10월 24일 확인(새 창)
-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탕평책의 실시 —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영조 즉위 300주년 기념 특별전 '탕탕평평 글과 그림의 힘' — 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 (2023-12-07, 확인 2026-10-25)(새 창)
- 영조 개천을 치다 — 청계천, 서울시설공단 · 2026년 10월 24일 확인(새 창)
- 영조어진 소장품 안내 — 국립고궁박물관 · 2026년 10월 24일 확인(새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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