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일운동
3·1운동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의 지배에 맞서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려고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으킨 비폭력 만세 운동이에요.
- 시작
-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일
- 다른 이름
- 기미독립운동
- 주도 인물
- 민족대표 33인(넓게는 48인)
- 결과
-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
- 분류
- 독립운동

3·1운동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고종이 독살됐다는 소문이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장례가 있던 1919년 3월 1일에 맞춰 조선 전역에서 봉기했어요. 배경에는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으로 이어진 무단 통치의 가혹한 탄압이 있었고,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중국·만주·노령·미주 등으로 망명했어요.
3·1운동의 배경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3·1운동의 배경을 아래 흐름으로 짚어요. 먼저 국권을 잃은 뒤 이어진 무단 통치가 있었어요. 국외에서는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원칙 14개 조항 가운데 하나로 민족자결주의를 내놓았어요. 윌슨은 이 원칙을 독일·오스트리아·튀르키예 같은 동맹국 식민지에만 적용하려 했지만, 피압박 민족들은 이를 복음처럼 받아들여 저마다 독립을 요구하는 근거로 삼았어요.
| 흐름 | 내용 |
|---|---|
| 무단 통치 |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중국·만주·노령·미주로 망명하거나 비밀결사를 만들어 지하로 숨었어요 |
| 민족자결주의 | 1918년 1월 윌슨이 제기. 재미 한인은 이승만·민찬호·정한경을 대표로 뽑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 했지만 미국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았어요 |
| 신한청년단 | 상하이에서 김규식을 파리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여운형을 시베리아로 보내고 김철·선우혁은 국내로 보내 종교계·사회 지도층과 접촉하게 했어요 |
| 2·8독립선언 |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백관수가 11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어요. 이광수를 뺀 10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유학생들은 귀국해 3월 1일 만세운동에 합류했어요 |
| 고종의 붕어 | 68세로 건강한 편이던 고종이 갑자기 붕어하자 국민은 의문을 품었고, 일제가 독살했다는 말이 퍼졌어요 |
출처3
윤치호는 일기에 고종의 죽음이 국민 감정을 자극해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고 적었어요.
3·1운동은 누가 어떻게 준비했나요?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이라고 불러요.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 않았지만 준비에 관여한 이들까지 합쳐 민족대표 48인이라고도 해요. 이들은 만세 운동이 실패한 뒤 모두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았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천도교는 1918년 12월경 권동진·오세창이 최린과 뜻을 모은 뒤 손병희를 찾아가 추진체를 만들었고, 독립운동의 3대 원칙을 대중화·일원화·비폭력으로 정했어요. 기독교는 이승훈이 정주와 선천·평양을 돌며 동지를 모았고, 불교는 최린이 한용운에게 협의해 합류했어요. 서명자는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으로 모두 33인이에요.
| 인물·집단 | 맡은 일 | 출처 |
|---|---|---|
| 손병희 | 천도교 지도자, 추진체 형성 | |
| 최남선 | 독립선언서 기초 | |
| 한용운 | 불교 측 대표, 공약 3장을 덧붙였고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간단한 식사(式辭)를 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 | |
| 이승훈 | 기독교 측 대표 자격으로 정주·선천·평양에서 동지를 모음 | |
| 박희도·김원벽 | 서울 학생층을 규합 | |
| 이종일 | 보성사 사장으로 독립선언서 인쇄 | |
| 프랭크 스코필드 | 캐나다 선교사, 참상을 해외에 알림 |
국가기록원이 복원한 판결 기록은 이들이 어떤 책임을 졌는지 보여 줘요. 48인은 체포(1919년 3월 1일)부터 최종 판결(1920년 10월 30일)까지 1년 7개월 동안 경성지방법원, 고등법원, 경성복심법원을 거쳤어요. 경성지방법원 예심은 48인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고등법원으로 넘겼지만(1919년 8월 1일), 고등법원은 내란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고 돌려보냈어요(1920년 8월 9일). 경성복심법원은 48인 가운데 37인에게 보안법·출판법·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을 적용해 징역 1년에서 3년 사이의 유죄 판결을 내렸어요.
전개는 날짜별로 어떻게 이어졌나요?
| 날짜 | 있었던 일 |
|---|---|
| 1919년 2월 27일 |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 1,000매를 비밀리에 인쇄. 28일 아침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 |
| 1919년 2월 28일 | 서울에 있던 민족대표 20여 명이 손병희의 집에서 마지막 회합 |
| 1919년 3월 1일 정오경 |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인이 인사동 태화관에 모임.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는 지방에 있어 불참 |
|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 4,000~5,000명 앞에서 한 청년이 독립선언서 낭독, 시위행진 시작 |
| 1919년 3월 1일 |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에서도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 선천에서는 일본 군경이 발포해 강신혁이 숨짐 |
| 1919년 3월 2일 | 경기도 개성에서 만세운동. 호수돈여학교 학생의 시위에서 시작 |
| 1919년 3월 3일 | 충청남도 예산 등에서 치열하게 전개 |
| 1919년 3월 4일 | 전라북도 옥구 시위 |
| 1919년 3월 8일 | 경상북도 대구 시위 |
| 1919년 3월 10일 | 전라남도 광주, 강원도 철원, 함경북도 성진·임명 시위 |
| 1919년 3월 11일 | 경상남도 부산진 시위 |
| 1919년 3월 13일 | 북간도 룽징에서 독립축하회. 중국 군대의 사격으로 18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침 |
| 1919년 3월 17일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규모 만세운동 |
| 1919년 3월 19일 | 충청북도 괴산 시위로 전국 13도가 모두 참여 |
| 1919년 3월 21일 | 제주 조천리 시위로 제주도까지 확산 |
| 1919년 3월 31일 | 평안북도 정주에서 약 4,000명 시위, 28명이 즉사 |
| 1919년 4월 1일 |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명이 만세. 현장에서 20명이 순국 |
| 1919년 4월 11일 |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 1919년 4월 15일 | 수원 제암리에서 주민 학살 |
3월 1일 서울 시위는 공약 3장에서 밝힌 대로 질서를 유지해 단 한 건의 폭력 사건도 없었고, 일본 군대와 기마 경찰이 강제로 해산시키며 주모자 130여 명이 체포·구금됐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정리해요. 지방 시위가 컸던 곳은 대체로 장날이었어요. 거사 계획이 새지 않게 하면서 사람을 모으기 쉬운 날이었기 때문이에요.
3·1운동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나요?
피해 규모는 집계 주체에 따라 크게 달라서 기준별로 나눠 적어요. 어느 쪽 통계로 봐도 3·1운동은 일제 강점 이후 유례없는 규모의 독립운동이었어요.
| 집계 기준 | 시위·참가 | 사망 | 부상 | 체포·검거 | 출처 |
|---|---|---|---|---|---|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 시위 1,542회, 회집 2,023,098명 | 7,509명 | 15,961명 | 46,948명 | |
| 조선총독부 《조선소요사건일람표》(1919년 4월 말까지) | 시위 참여 587,641명(50명 이하 제외) | 553명 | 1,409명 | 26,713명 | |
| 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 데이터베이스 | - |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망자 934명 | - | - | |
| 대한민국 임시정부 집계 | - | 7,483명 | - | - | |
| 1953년 정부 작성 '3·1운동시 피살자 명부' | - | 630명 수록 | - | - |
박은식의 통계는 3월에서 5월까지를, 조선총독부 통계는 4월 말까지를 정리한 것이어서 단순 비교는 어려워요. 일제 측 자료를 실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표는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시위가 1,214회였고 그중 단순 시위가 778회, 시위 충돌이 426회였다고 적어요. 이 사전은 박은식 통계가 국내에서 운영된 연통제 보고서를 근거로 한 것이라 당시 피해일 뿐이며, 이후 중상자의 사망과 색출 과정의 피해까지 더하면 사망자가 더 늘 것이라고 설명해요. 국사편찬위원회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망자 수"가 934명이고 자료 수정과 추가 발굴로 숫자가 더 늘 수 있다고 밝혔어요. 2013년 국가기록원은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3·1운동 피살자 명부(1권, 630명)를 처음 공개했어요.
주요 희생 지역은 어디인가요?
| 날짜 | 지역 | 내용 |
|---|---|---|
| 1919년 3월 31일 | 평안북도 정주 | 기독교·천도교 연합 시위 약 4,000명, 28명 즉사·99명 이상 부상 |
| 1919년 4월 1일 | 천안 아우내 장터 | 3,000여 명이 모여 만세, 철도경비대 사격으로 20명 순국 |
| 1919년 4월 15일 | 수원 제암리 | 일본군 중위가 천도교·기독교 신자 20여 명을 교회에 모아 사격하고 불을 질렀음. 교회 안에서 23명, 고주리에서 6명 사망 |
| 1919년 4월 2~17일 | 수원·안성 | 주동자 체포를 빙자해 64개 마을을 수색, 2,000여 명 체포(803명 구금), 29명 살상, 민가 276호 방화 |
출처3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은 1982년 12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됐고, 경기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22-4번지에 있으며 면적은 607㎡예요. 영국인 스코필드가 보도한 제암리 참변은 세계에 알려져 일본에 대한 비난이 높아지는 계기가 됐어요.
체포 이후에도 탄압이 이어졌어요. 3·1운동 뒤 그해 10월까지 식민지 통치 법조문이 적용돼 구속된 사람은 1만 8,000여 명이었고, 기소 절차를 마친 피고는 보안법 위반 6,472명, 소요죄 2,289명, 내란죄 296명, 기타 232명으로 모두 9,289명이었어요.
3·1운동은 공식적으로 어떻게 불리고 법적으로 어떻게 평가되나요?
| 시기·기관 | 명칭·평가 |
|---|---|
| 1919년 당시 일본 정부 | 공식 사건 명칭은 '조선만세소요사건'이고 기본 시각은 '소요' |
|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 3월 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이름을 '독립선언일'로 정함 |
| 1946년 2월 21일 미군정 | 군정법률 제2호로 3월 1일을 경축일로 지정 |
| 1949년 10월 1일 | 법률 제53호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3·1절이 4대 국경일에 포함 |
| 현행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2조 | 국경일 가운데 3·1절은 3월 1일 |
| 현행 대한민국헌법 전문 |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힘 |
| 현행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2조 |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독립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을 바탕으로 이룩됐다는 예우의 기본 이념을 규정 |
같은 법 제4조는 독립유공자를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 나눠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사람으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사람이 대상이에요. 1920년 재판에서 일제 사법부가 적용하려 했던 내란죄와 실제 적용된 보안법 등은 앞의 판결 기록 대목에서 볼 수 있어요.
3·1운동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갈리나요?
평가가 갈리는 지점은 몇 가지예요. 아래는 한국어 위키백과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소개한 견해를 말한 사람별로 나눈 거예요.
| 쟁점 | 견해 |
|---|---|
| 참가 인원 | 일본 학자 야마베 겐타로는 50만 명 이상, 신복룡은 46만 명 정도로 추정. 역사학연구소와 한영우는 박은식 통계에 따라 200만여 명으로 서술 |
| 규모 추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운동 횟수 2,000회 이상, 참가 인원 2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일제 측 자료는 참가 군 212곳에 약 110만 명으로 집계 |
| 비폭력 여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3월 1일 서울 시위가 질서를 유지했다고 정리. 일제 측 자료는 전국 시위 1,214회 가운데 충돌이 426회였다고 집계 |
| 윤치호의 시각 |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으나, 3·1운동이 조선인에 대한 국내외 시각을 개선시켰다고도 평가 |
| 김창제의 비판 | 이화여자중학교 교사였던 김창제는 만세 운동 중 유언비어와 미신이 퍼졌고 시위가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지적하며 참여하지 않았다고 밝힘 |
| 일본 측 인식 | 경기도 경찰부장을 지낸 지바 료는 글에서 3·1운동을 "민족 본능의 지하수의 분출"이라고 표현 |
| 문화통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총독 자격을 무관에서 문관으로 바꾸고 보통경찰제 도입, 태형 폐지, 한국인 신문 발행 허가를 했지만 일본군 병력과 경찰을 늘렸으므로 국제 여론과 회유를 위한 위장 정책이었다고 평가. 한국어 위키백과는 실제로는 문관 총독이 한 명도 임명되지 않았다고 지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3·1운동이 끝내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민족사적·사상사적·경제사적으로 의의를 남겼다고 평가해요.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고, 자주독립사상과 자유평등·민주주의사상이 나타났으며, 민족기업을 세우려는 흐름이 이어졌다는 거예요.
사료와 현장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 자료·장소 | 무엇을 볼 수 있나 | 출처 |
|---|---|---|
|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 사건정보, 탄압정보, 독립운동·동향정보, 격문·선언서, GIS 서비스, 인물정보 | |
| 국가기록원 | 3·1운동 핵심 참가자 48인의 형사판결원본·형사재판서원본 1,149매를 복원해 원본 이미지를 누리집에 공개 | |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와 공훈록. 예: 유관순 | |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 사적으로 지정된 학살 현장 | |
|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 한강 이남에서 처음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소개.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영명길 29 | |
| 하동군 3·1운동 누리집 | 하동읍 3월 13일을 시작으로 4월 중순까지 십여 차례의 만세운동 연표 |
군산은 영명학교·예수병원·구암교회가 주축이 돼 만세운동을 일으켰고 전국으로 번지는 도화선이 됐다고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소개해요. 하동에서는 주로 장날을 이용해 수백 명에서 천여 명이 참여했고, 적량면장이던 박치화 등 12명이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낭독했으며, 3·1운동으로 체포돼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하동 출신이 33명으로 기록돼 있어요.
유관순은 공훈록에 1919년 4월 1일 갈전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고 기록돼 있어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가로 서훈됐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했나요?
규모를 모으면 아래와 같아요.
| 항목 | 내용 |
|---|---|
| 시위 기간 | 약 3개월 |
| 조선총독부 집계 | 《조선소요사건일람표》 합산(1919년 4월 말까지) 시위 참여 58만 7,641명, 검거 2만 6,713명, 시위 참가자 사망 553명·부상 1,409명 |
| 당시 조선 인구 | 1,678만 8,400명 |
| 참여 비율(학자 견해) | 인구의 2.76%~2.97% |
야마베 겐타로는 50만 명 이상, 신복룡 교수는 46만 명 정도로 추정해요. 조선총독부는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했어요.
어떤 결과를 낳았나요?
3·1운동을 계기로 한 달 뒤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어요. 대한민국 제헌 헌법은 3·1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혔어요.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꿨어요.
3·1운동은 연도별로 어떻게 이어졌나요?
| 연도 | 사건 |
|---|---|
| 1910년 | 국권 상실. 이후 무단 통치 |
| 1918년 | 1월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제기 |
| 1919년 | 2월 8일 도쿄 2·8독립선언, 3월 1일 독립선언과 만세운동,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 1920년 | 임시정부가 3월 1일을 '독립선언일' 국경일로 지정. 8월 9일 고등법원이 내란죄 부정,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이 48인 가운데 37인 유죄 |
| 1946년 | 2월 21일 미군정이 3월 1일을 경축일로 지정 |
| 1949년 |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정, 3·1절 포함 |
| 1953년 | 정부가 '3·1운동시 피살자 명부' 작성(2013년 공개) |
| 1962년 | 유관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 |
| 1982년 | 12월 21일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사적 지정 |
| 1988년 | 현행 헌법 시행, 전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명시 |
| 2019년 | 3월 1일 유관순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가 서훈 |
출처
- 3·1 운동 — 위키백과 · 2026년 8월 19일 시행 · 2026년 10월 24일 확인(새 창)
- 3·1 운동(Q482525) — 위키데이터(Wikidata) · 2026년 10월 24일 확인(새 창)
- 3·1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민족의 자주독립을 온 세계에 선언한 날 「3.1절」 — 국가기록원 뉴스레터 제122호 (2022년, 확인 2026-10-25)(새 창)
- 3·1운동 앞장선 48인의 판결 기록물 복원 — 국가기록원 뉴스레터 제122호 (2022년, 확인 2026-10-25)(새 창)
- [3·1운동 100년] 평화행진 첫날부터 발포한 日, 만행·사망자 조직적 은폐·축소 — 서울신문 (2019-02-27, 확인 2026-10-25)(새 창)
- 3·1운동, 日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단 최초 발견·공개 — 서울신문 (2013-11-19, 확인 2026-10-25)(새 창)
- 대한민국헌법 전문 — 국가법령정보센터(법제처) · 1988년 2월 25일 시행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국경일에 관한 법률 — 국가법령정보센터(법제처) · 2014년 12월 30일 시행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 국가법령정보센터(법제처) · 2026년 8월 20일 시행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사적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 국가유산포털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유관순 독립유공자 공훈록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하동군 3·1운동 의미 — 하동군청 · 2026년 10월 25일 확인(새 창)
- 정부, 유관순 열사에 ‘1등급 건국훈장’ 추가 서훈 — 정책브리핑 (2019-02-26, 확인 2026-10-25)(새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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